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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7,8월 내내 장마전선이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비를 뿌려대었다. 장마가 지나면 폭염이 온다더니 습하고 끈끈한 날이다. 끈끈한 날이지만 견딜만한 날씨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 선풍기를 미풍에 틀어 놓고 베개 하나 가슴에 받쳐놓고 바닥에 배 깔고 책 하나를 슬며시 갖다 놓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 신영복.

 

신영복

저자는 경남 밀양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재직 중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1988년에 출소한다. 그는 출소 후 2006년 정년퇴임 전까지 성공회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흑색종 투병으로 요양중 2016년에 사망하였다.

 

편지에 담긴 예민함

이 책은 20년간의 옥중생활 동안 저자가 가족에게 쓴 서간을 모은 단편집이다. 68년부터 88년, 2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는가? 유신체제, 10.26 사태, 12.12 쿠데타, 5.18 민주화운동, 6.29 항쟁 등. 감옥에서 바깥세상의 절망과 희망에 대한 소회를 서신검열과 정보수집의 한계로 서간에 모두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은유와 비유로 당신의 이야기를 일상 속에서 녹여내고 있다.

 

단편적으로나마 이 책의 한두 토막을 적어봄으로써 저자의 사색의 깊이를 가늠해보시길.

1983년 3월 29일. 형수님께 쓴 서간의 끝부분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타인을 돕는다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귀이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로서 타인을 돕는 것이 었으나 저자는 같이 비를 맞으라고 한다. 제삼자가 아니라 그 사람과 연대하여 함께 하라고 한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돕는다는 것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1983년 5월 29일 계수님께 쓴 서간의 중간 부분에 나오는 아프리카 민요와 문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밝힌 부분이다.
내 눈에는 다래끼가 났는데,
악어란 놈이 내 다리를 잘라먹었네.
마당에 있는 염소란 놈 풀을 먹여야 할 텐데
솥에는 멧돼지 고기가 끓어 넘는구나.
돌절구에 빻다 만 곡식이 말라빠지고 있는데
추장은 나더러 재판받으러 오라네.
게다가 나는 장모님 장례식에도 가야 할 몸.
젠장 바빠 죽겠네.
(중략)........
아프리카는 문화인류학자들이 근시 안경에는 다 담을 수 없는 원대한 규모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뜻을 재정립하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의 고뇌에 대해 싱싱하고 건강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자는 아프리카에 사는 어떤 남자의 일상을 노래한 민요를 소개한다. 이 아프리카 아저씨 주변 상황은 좋지 않다. 담담하게 얘기하지만 실상은 참혹하다. 그래도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라고 저자나 나에게 가르치는 듯하다. 앞으로 수없이 이것저것에 부딪치며 살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일상은 힘들어도 담담하게 살아내라고 훈수를 두는 듯하다. 다리도 멀쩡하고 추장 찾아뵐 일도 없는 한가한 나는 살아야겠다.

 

숭늉 맛이 난다.

저자 신영복은 경제학자이다. 그런데 20여 년 옥고를 치르며 생활(?) 철학자, 고전 연구자, 수필가로 거듭난 듯하다. 한 없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일상에서 알게 된 삶의 지혜를 깊이 사색하여 멋진 필력으로 희망을 품은 글로 남긴 것에 감탄할 뿐이다.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맵고 짜고 달고 신 음식이 아니라 구수한 숭늉에 밥 말아먹는 맛이 난다. 절망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철학자의 20여 년의 삶을 이 책. 480여 페이지 곳곳에 박혀있다.

 

*통일혁명당 사건 : 박정희 집권 시기였던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조직 사건으로 158명이 검거되어 50명이 구속된 1960년대 최대의 공안 사건이다.
*다래끼 : 속눈썹의 뿌리에 균이 들어가 눈시울에 생기는 작은 부스럼
*아라공 :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 소설가,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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